머슴살이를 하다 죽은 한 남성의 제사를 마을사람들이 지내주는 특이한 사례가 있다. 그것도 벌써 60년째. 대흥 탄방리에서는 매년 음력 2월 초하루에 머슴생일날 독특한 행사를 치른다.이 마을 5개반 주민들이 반별로 돌아가며 음식을 준비해 산소에서 제사를 지내며, 망자를 추모하고 하루종일 마을잔치를 벌인다. 60년째 이어져 내려오는 이 전통은 농사일이 시작되기
정월은 떡국을 끓여먹고 조상께 차례상을 올리는 설날로 시작된다. 그리고 오곡밥과 나물을 해먹고 부럼과 귀밝이술을 먹으며 한해 무탈과 풍년을 기원하는 대보름이 있다. 두차례 큰 명절치레를 하고 나면 정월이 가기 전에 꼭 해야하는 일, 바로 장담그기다.전통에 따르자면 장 담그는 일은 아무 때나 하는게 아니다. 옛어른들은 반드시 말날(午日)에 장을 담갔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넘쳐나는 차들로 주차전쟁에, 도로건설에 목을 매지만 한동네에 자가용 가진 집이 하나쯤이거나 혹은 아예 없거나 했던. 다른 도시에 가려면 당연히 버스나 기차를 타야했던. 그리고 그 시절의 택시는 거의가 하늘색 혹은 노란색 ‘포니’였다. 포니, 지금처럼 영어세상이 아니던 시절이어서 그 뜻이 ‘조랑말
들녁에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이즈음 ‘부지깽이라도 빌릴’정도로 바쁜 것은 농민만이 아니다. 수확한 벼를 그대로 먹을 수는 없는 법, 민족의 주식인 쌀로 변신시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 바로 정미소다.요즘은 콤바인이 벼를 베는 동시에 그자리에서 1톤씩 포대에 착착 담아 트럭에 싣고 가기만 하면 알아서 건조, 도정, 포장, 저장까지 해
밤 이슥한 시간, 잠은 안오고, 텔레비전도 재미없고, 책도 보기 싫으면, 실내복 차림 그대로 슬리퍼 끌고 동네 비디오대여점에 나가 ‘요즘 젤 잘나가는게 뭐냐’물어 비디오 하나 들고오던 때가 있었다. 가족여행이나 극장 나들이 따위의 특별 프로그램이 없어 허전한 주말, 그나마 ‘문화생활을 했다’는 위로를 얻기에 비디오만한게 없었다. 명절의 부산함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는 미혼들의 명절연휴, 그 적막한 시간들을 함께 한 것도 비디오였다. 서너편은 기본으로 빌려 쌓아놓고는 장르와 내용을 넘나들며 연속상영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줄거리도 섞이고
예산에 특별히 많은 것은? 사과나무, 인물, 저수지, 그리고… 국수공장.쌍송배기에서 예산읍내 시장으로 내려가면서 만나는 풍경 가운데 굵은 무명실같은 국수면발이 시누대에 허리를 걸치고 죽 널려있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런 장면은 예산역 근처에서도 만날 수 있다. 예산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이 장면을 다른 지역사람들은 신기해 한다. 이
예산읍에 양복점이 30여곳이나 되던 시절이 있었다. 읍내만 치자면 20곳 정도의 양복점들이 성업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지금같은 기성복이 없던 1970년대 얘기다.언제부턴가 양복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양복점 대신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성복판매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남성들의 의생활이 잠깐 사이 바뀌었다. 양복점 간판은 내렸으나 갖고 있는 기술을 놓기
현 신암면사무소에서 구 면사무소 쪽으로 내려가다보면 단정한 조경수들의 호위 속에 넓은 처마가 예사롭지 않은 집이 눈에 띈다. 그 맞은편 은행나무 네댓그루가 만든 넉넉한 그늘아래 자리한 평상이 오가는 길손을 부르고…. 마을회관도, 동네구판장도 아닌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올커니, 대한민국 서민들의 삶과 애환이 서린 막걸리 양조장이다. 별스럽
오랜 역사와 많은 이들의 추억, 애환을 담고 있지만, 경제적 가치가 없어 사라지는 건물들이 참 많다. 아쉽고 아깝지만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고, 관공서도 아닌 사유재산이어서 소유주가 아닌 이상 어느 누구도 ‘지키라 마라’ 할 권리가 없는. 아직 누군가 지켜줘서 고맙게도 우리곁에 있는 역사적 건물들을 보존할 방법은 없을까.예산의 대표적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들들은 물론이고 딸들도 아버지 손에 붙들려 이발소 아저씨에게 머리를 맡기던. 이발소에 들어서면 하얗고 짧은 가운을 입은 아저씨가 의자에 앉혀 꼬스름을 태워주던. 남자애들 머리래야 스님들처럼 삭발을 하는게 대부분이고, 여자애들도 뒷목이 다 드러나게 짧은 단발이거나 성별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커트로 마무리 되던.이발소는 색바랜
깜짝 놀랐다. 예산군에서 마지막 남은 솜틀집 의 밤색 샷시문을 밀고 들어가자 잔잔한 클래식 연주가 귀에 들어온다. 작업대 한켠에 있는 작은 카세트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이불솜을 꿰메던 주인 송덕순(73)씨가 “내가 클래식을 좋아해” 라며 수줍게 웃는다. 1950년대에 여고를 졸업했다니, 당대 엘리트다. 말품새에서도 그런 느낌은 고스란히 전해온다.간판이름 보다는 ‘오리동 솜틀집’으로 더 유명한 이 곳은 시간이 1970년대 어디쯤 정지돼 있는 것 같다. 일제때 시아버지께서 논 한섬지기 값을 주고 샀다는 솜타는 기계, 예전에는 3대가 종일 돌아갔는데 요즘은 목화농사짓는 사람이 없어 거의 쓸일이 없어진 목화씨 빼는 기계, 추를 매달아 재는 저울, 2대째 가업으로 이어오면서 모서리가 반질반질하게 닳아진 나무 작업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