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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박사공파

기사승인 2021.01.25  14: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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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호제 교수와 함께하는 예산의 성씨> - 신양면 대덕리·청양군 운곡면 광암리

진주강씨 박사공파는 400여년 전인 17세기 초에 예산군 신양면 대덕리와 군계로 맞닿은 청양군 운곡면 광암리·미량리에 입향하여 현재까지 세거하고 있다. 

진주강씨는 고구려 말 수(隋)나라의 침략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도원수(都元帥) 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모신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 황제가 실시한 과거에서 강진(姜縉)이 장원급제한 후 태중대부판내의령(太中大夫判內議令)을 역임하다가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지면서 본관을 진주(晉州)로 하게 되었다. 강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는 진주, 금천, 안동, 백천, 해미, 동북, 광주 등 7본(本)이다. 모두 진주의 지파로 강씨는 유일본을 내세우고 있어 강이식이 모든 강씨의 도시조(都始祖)가 된다.

파명 중시조 별칭
박사공파
(博士公派)
강계용
(姜啓庸)
어사공파
(御使公派)
소감공파
(少監公派)
강위용
(姜渭庸)
 
시중공파
(侍中公派)
강원용
(姜遠庸)
관서대장군파
(關西大將軍派)
은열공파
(殷烈公派)
강민첨
(姜民瞻)
 
인헌공파
(仁憲公派)
강궁진
(姜弓珍=姜邯贊父)
금천강씨
(衿川姜氏)

진주강씨는 크게 5파로 구분된다. 박사공파는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역임한 후 원종 15년(1274) 원나라가 일본을 공격할 때 통신사(通信使) 서장관(書狀官)을 맡았던 강계용(姜啓庸)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며, 이때부터 1세로 계대(計代)한다. 그리고 강계용의 손자 강사첨(姜師瞻)이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냈으므로 ‘어사공파’라고도 하고, 7세 강회중(姜淮仲)의 호 통계(通溪)를 따서 ‘통계공파’라고도 하며, 8세 강안복(姜安福)이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므로 ‘참판공파’라고도 한다. 강안복은 아들 9명[利纘·利仁·利誠·利敬·利順·利行·利興·利溫·利恭]을 두었는데, 박사공파가 번창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강이찬(?~1492)의 아들 강지(姜漬, 1453~1517, 호:慕庵)는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봉되었고 부친과 함께 영선군(永善君)에 봉해졌으며, 벽상(壁上)에 초상을 그리게 하고 사전(賜田) 100결을 내려 주었다. 강지가 세상을 떠나자 중종은 예조좌랑 임권(任權)을 보내어 조문하게 하고 병조판서를 증직하였으며, 소정(昭靖)의 시호를 내렸다.

중시조 강계용 이후 3세 강사첨까지의 설단(設壇)과 4세 강창귀(姜昌貴)의 묘소는 경남 합천(陜川)에 있으나, 5세 강군보(姜君寶) 이후 12세 강질(姜礩, 1508~1571, 司憲府執義)까지의 묘소는 서울 주변의 경기도 고양, 양주, 광주 등지에 조성되어 있다.

 

姜應明·配全州李氏 墓(신양면 대덕리).

진주강씨 박사공파는 예산군 신양면 대덕리와 청양군 운곡면 미량리·광암리·추광리, 그리고 남양면 일대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예산 청양 지역 최초 입향은 강질의 아들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강질은 아들 6명[13세, 應時·應運·應明·應吉·應亨·應平]을 두었는데, 셋째 강응명(1535~1606, 宣略將軍 行龍驤衛副司直)의 묘가 신양면 대덕리에 있고 다섯째 강응형(호:中正, 通德郞)의 묘가 청양군 운곡면 미량리에 있으므로 이들이 최초의 입향조라고 볼 수 있다. 

강응명의 세 아들[14세, 秀崦·秀嶪·秀崙] 중 강수엄의 후손만은 대덕리에 세거하면서도 무반(武班)을 다수 배출하였으나, 둘째 강수업과 셋째 강수륜의 후손들은 4~5세 이후에 서천 지역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강응형의 후손들도 14세부터 부여 김포 등지로 옮겨간 상태이다. 

강질의 둘째 강응운(1532~1568, 彰信校尉)의 첫째 아들 강수헌(姜秀巘, 1562~1602) 이후 후손들이 운곡면 미량리에 세거하였고 둘째 강수곤(姜秀崑, 1555~1620, 壬辰扈從 吏曹參判)과 후손들의 묘가 본래 광주에 있었으나 1968년부터 강원록(姜元祿, 1596~1663, 동몽교관)과 아들 강선여(姜善餘, 1574~1647, 百千窩), 손자 강성거(姜聖擧, 1613~1675, 龍驤衛副司果)의 묘를 광암리로 이장하였다. 

강질의 넷째 강응길(姜應吉, 生員, 孝旌)의 둘째 강수대(姜秀岱)의 묘가 신양 대덕에 있으나, 3~4대 이후 청양 홍주 대흥 등의 주변지역으로 옮겨 갔다. 강질의 여섯째 강응평(姜應平)의 6세손 강제영(姜齊英) 이후 모곡리 신대리에서 세거하였다.

 

姜善餘·姜元祿·姜聖擧 墓(왼쪽부터, 配位合葬).

현재 광주에 묘가 있는 강수곤은 선조(宣祖)의 비(妃) 의인왕후(懿仁王后)와 이종(姨從) 사촌 관계였는데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하였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전란 중에 고창현감(高敞縣監)으로 유랑민을 보살펴 구원’했던 사실이 수록되어 있어 그의 인품을 짐작하게 한다. 

강수곤의 아들 강선여는 1610년(광해 2)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1627년 관직에서 물러나 청양에서 살았다. 1627년 명나라 15대 황제 희종(熹宗, 연호:天啓)이 죽어 이듬해인 1628년 진향사(進香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에 갔을 때, 16대 황제 의종(毅宗, 연호:崇禎)으로부터 공자(孔子)의 화상(畫像)을 받아 광암리에 봉안하였다. 이를 계기로 공자가 강학(講學)하던 곳을 의미하는 ‘수사(洙泗)’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 
 

百德齋와 姜善餘 神道碑.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표현된 ‘수영동(水永洞)’과 ‘두암(斗巖)’이 합쳐져 ‘광암리’가 되었는데, 현재 ‘수령동’이라 통용된다. 마을 입구에서 보이는 사례문(四禮門)의 안쪽에 재실로 사용되는 백덕재(百德齋)가 있고, 오른쪽에는 강선여의 신도비(神道碑)와 봉환성상사적비(奉還聖像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신도비 왼편에 자연석을 깎아서 ‘백천와강선생서원유허(百千窩姜先生書院遺墟)’라고 새긴 비석은 이곳에 공자를 모시는 사당 또는 후진을 교육하는 서원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인다. 

그러나 광암리에 봉안했던 성상은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청양향교 대성전에 옮겨 보관하다가, 현재 원본은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93년 12월 24일 청양군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곽호제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yes@yesm.kr

<저작권자 © 예산뉴스 무한정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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