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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사맹공파

기사승인 2020.11.30  13: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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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호제 교수와 함께하는 예산의 성씨> - 대흥면 금곡리

대흥면 금곡리는 18세기 중엽 진주강씨(晉州姜氏) 사맹공파(司猛公派)가 입향하여 세거한 대표적인 집성촌이고, 대흥면 금곡리 이외에도 대술면, 봉산면, 고덕면, 신양면, 응봉면, 오가면, 광시면 등 여러 지역에 분포되어 세거하고 있다.

진주강씨는 고구려의 강이식(姜以式) 원수(元帥)를 시조로 모신다. 강이식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한 정사(正史)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단재 신채호가 중국의 『서곽잡록(西郭雜錄)』을 인용해서 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확인된다.

597년(영양왕 8)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신하의 나라로 예속시키고자 무례한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강이식은 “이러한 무례한 국서를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이후 수 문제(文帝)가 침공해와 여수전쟁(麗隋戰爭)이 일어나자 강이식은 고구려의 최고 사령관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맡아 정병(精兵) 5만을 이끌고 임유관전투(臨渝關戰鬪)에서 대승리하여 수문제 정권이 몰락하게 되었다.

강이식 이후 세계(世系)가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 헌강왕(憲康王, 875~885) 때 강진(姜縉)이 당(唐) 황제가 시행한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후 태중대부판내의령(太中大夫判內議令)을 역임하고 진양후(晉陽候)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강씨(姜氏)가 본관을 진주(晋州)로 하게 되었다.

 

강민첨 장군 묘 전경(예산군 대술면 이치리 산34).

그후 진주강씨는 여러 파(派)로 분파(分派)되었다. 은열공파(殷列公派)는 1018년(고려 현종 9) 거란의 3차 침입에 상원수(上元帥) 강감찬(姜邯贊)과 함께 부원수(副元帥)로 귀주대첩(龜州大捷)을 이끈 강민첨(姜民瞻, 936~1021, 시호:殷烈)을 중시조로 모시고, 강민첨을 ‘은열공파’ 파조(派祖)로 1세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강민첨의 묘는 예산군 대술면 이치리 산34에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9호로 지정되었다.

은열공파는 10세 강자해(姜自海, 1434~?)가 15세기에 통사랑(通仕郎)으로 사맹(司猛)을 지냈기 때문에 ‘사맹공파(司猛公派)’로 다시 분파되었다. 강자해는 형 강자위(姜自渭)와 함께 어머니 함양박씨(咸陽朴氏)를 모시고 전북 익산에서 송악면 동화리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아산시와 천안시 일대에 진주강씨 사맹공파가 넓게 분포되어 세거하고 있다.

강자해의 손자 12세 강희윤(姜希尹, 1501~1559, 호:松澗, 司憲府監察)이 네 아들[뢰(磊=通德郞公)·정(晶=右尹公)·삼(森=秉節校尉公)·품(品=承旨公)]을 두었는데, 네 아들의 관직명을 이용하여 파명(派名)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들 네 형제의 묘는 모두 아산 송악 동화리에 있다.

예산 지역의 사맹공파는 모두 넷째 품을 제외한 세 아들[뢰·정·삼]의 후손들이다. 강품(姜品, 1539~1612, 호:毅堂, 贈通政)의 후손들은 부여 지역에서 정착하였다. 강희윤의 장남 강뢰(姜磊)의 아들 강응경(姜應慶)이 당진 합덕으로 옮겨서 그의 증손 강세정(姜世貞)까지 살다가, 18세 강일문(姜一璊)이 대흥면 금곡리에 이전에 터를 잡았던 전주이씨(全州李氏)와 혼인하면서 처향(妻鄕)으로 입향하였다.

 

강일문·배전주이씨 묘.
전주이씨 묘표.

강일문의 묘는 배 전주이씨와 합봉(合封)되어 있는데, 묘의 오른쪽에 조선시대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주이씨의 묘표(墓標)가 화강석 재질로 마모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다. 2014년에 합덕에 있던 강응경 이하 4대의 묘를 금곡리로 옮겨 납골묘를 조성하였다.

강일문의 세 아들[운(墵)·서(墅)·견(堅)] 중 첫째 강운(姜墵)의 자손은 족보에 21세까지만 수록되어 있고, 22세 이후는 누락되어 계대(繼代)를 알 수 없다. 둘째 강서(姜墅)의 후손은 대흥면 금곡리 주변과 신양면 하천리에 세거하고 있다. 셋째 19세 강견(姜堅) 이후 4세[견·정진(正鎭)·이구(履九)·화(花)]가 당진 합덕에 정착하였다가, 강이구(姜履九)의 손자 23세 강창주(姜昌周)부터 고덕면 일대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강희윤의 차남 강정(姜晶, 漢城府右尹)의 장남 강우문(姜遇文)의 5세손 19세 강질(姜耋)과 강기(姜耆) 형제가 오가면과 대흥면에 정착하여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한편 16세 강여보(姜汝輔)의 4세손 20세 강해진(姜海鎭) 강하진(姜河鎭) 형제가 대술면 시산리에 입향하여 그들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번성하였다. 강여보 이하 3대의 묘는 본래 홍성군 결성면 장목동에 있었으나 실전(失傳)하여, 2006년에 대술면 시산리(사정리 대산소)에 설단(設壇)하였다. 그리고 강정의 3남 강득문(姜得文)의 증손 17세 강세행(姜世行)이 고덕에 정착한 이후 후손들이 고덕면과 봉산면 일대에 정착하였다.

강희윤의 3남 강삼(姜森, 1530~?, 宣務郎 秉節校尉)이 두 아들[흥경(興慶)·창경(昌慶)]을 두었는데, 강흥경의 7세손 강이언(姜履彦)이 고덕면으로 입향하였고 그의 후손들이 고덕면과 봉산면 일대에서 세거하고 있다. 강삼의 차남 강창경(姜昌慶)의 후손에서는 18세 강일수(姜一琇)가 잠시 태안(泰安)에 살다가 19세 강필만(姜弼萬, 1711~1772)이 대흥으로 입향하였다. 그후 그의 차남 강흡진(姜洽鎭, 贈通政)의 후손들이 대흥면과 광시면 신양면 일대에서 세거하고 있다.

곽호제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yes@yesm.kr

<저작권자 © 예산뉴스 무한정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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