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ad39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부여서씨(扶餘徐氏)

기사승인 2020.10.26  14:07:41

공유
default_news_ad2

- <곽호제 교수와 함께하는 예산의 성씨> - 신양면 신양리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는 약 500여년 전에 부여서씨가 입향하여 현재까지 세거하고 있는 집성촌이고, 그 범위는 인근의 대덕리와 하천리, 시왕리 등으로 확대되었다.

부여서씨는 백제 의자왕(義慈王, 재위:641~660)의 (첫째 또는 셋째?) 아들인 서융(徐隆)을 시조로 모시며, 본래의 성씨는 부여씨(夫餘氏) 또는 여씨(餘氏)였다. 부여씨의 연원은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왕(溫祚王, 재위:B.C18~A.D.28))이 부여(夫餘)에 뿌리를 둔 고구려의 일파가 남하한 세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百濟本紀 第一)와 『삼국유사(三國遺事)』(紀異 第二)에 ‘온조가 추모(鄒牟=高朱蒙)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고, 백제 초기 한성(漢城) 시대의 무덤인 서울 석촌동 고분이 고구려 초기의 장군총과 같은 형식인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라는 점, 그리고 27대 성왕(聖王)이 사비(泗沘)로 천도한 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고 고친 점이 증명한다.

『부여서씨세보(扶餘徐氏世譜)』에 의하면, 부여융(扶餘隆, 615~682)은 660년(의자왕 20) 백제가 나당(羅唐)연합군에 패한 뒤에 멸망하여 부친 의자왕과 태자 등이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 고종(高宗)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융에게는 ‘서씨(徐氏)’의 성을 하사하고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하여 웅진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부여서씨의 문호가 시작되었으나 서융 이후의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알 수 없고, 서융의 원손(元孫)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고 태원군(太原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모시며 ‘부여(扶餘)’를 본관으로 삼았다.

 

부여융 초혼가묘와 단비](부여 능산리 소재).

의자왕과 융은 당나라에서 죽었으나 묘를 찾지 못하다가, 1920년 중국 하남성(河南城) 낙양(洛陽)의 북망산(北邙山) 청선리(淸善里)에서 융의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되었다. 2000년 4월 북망산에서 영토(靈土)를 모셔와 동년 9월 30일 부여 능산리 선왕(先王)의 능원(陵園)에 초혼가묘(招魂假墓)를 조성하고 단비(壇碑)를 조성하였다.

부여서씨는 크게 3문중[三門中]으로 분파되었다. 고려시대에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고려시대 재화를 저장하고 공급하며, 상세(商稅)를 징수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의 장)를 지낸 6세 서춘(徐椿)의 후손들이 ‘판내부시사공문중(判內府寺事公門中)’이라 구분하고, 서춘의 동생 서박(徐樸)의 손자로 봉례랑(奉禮郎:조회·의례 등의 일을 관장하던 각문(閣門)의 종6품직)을 지낸 서열(徐悅)의 후손들이 ‘봉례랑공문중(奉禮郎公門中)’, 직장(直長:궁궐 내의 재정·물품담당 아문에 배치되어 전곡·비품 등의 출납실무를 담당하였던 종7품직)을 지낸 서이(徐怡)의 후손들이 ‘직장공문중(直長公門中)’으로 구분하였다. 3문중의 아래에 다시 23개 소종파로 세분하였다.

부여서씨 6세 서춘(徐椿)의 묘는 경기도 화성(華城)에 있으나, 8세 서열(徐悅)의 묘가 논산 가야곡에 있고 서이(徐怡)는 부여 삼룡리에 설단하여 모시고 있다. 서열의 후손들인 봉례랑공문중은 현재까지 논산 가야곡을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직장공 서이는 세 아들[鳳來·鳳翔·鳳壽]을 두었는데, 장남 서봉래의 후손들[平虜衛公派]은 평안도 지역과 충북 단양, 전북 익산 지역으로 옮겨갔다. 차남 서봉상의 후손들은 주로 부여 지역에 세거하고 있다.

 

부여서씨 입향조 서봉수·배고령김씨 묘.

서봉수는 손자 넷[玲·琳·璘·瑠]를 두었는데, 서영(徐玲)의 아들 서윤무(徐允武, 佐郞)의 후손들은 ‘좌랑공파(佐郞公派)’로 구분하며 주로 북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둘째 림(琳)과 넷째 류(瑠)는 당대 또는 2~3세 후부터 무후(無後)이다.

예산 신양에 세거하는 부여서씨는 직장공 서이의 셋째 아들 9세 서봉수(徐鳳壽, 別侍衛)부터 비롯되었으며, 셋째 손자 린(璘)의 후손들이 거의 이곳에서 세거하고 있고, 서봉수와 그의 후손들의 묘가 대부분 신양면 신양리 오리동과 공장동에 조성되어 있다.

서린(徐璘, 1481~1563, 자:叔玉)은 두 아들[士諴·士諶]을 두었는데, 장남 서사함(徐士諴, 1514~1585, 자:公燮, 參奉)의 아들 서응길(徐應吉, 1566~1643, 호:梅月巖, 通德郞)의 후손들이 ‘매월암공파(梅月巖公派)’로 구분하고, 차남 서사심(徐士諶, ?~?, 宣傳官)의 후손들은 ‘선전공파(宣傳公派)’로 구분한다.

매월암공파에서 서응길의 증손부터 4대(16~19세)에 걸쳐 계속 관직에 나아갔다. 특히 19세 서도유(徐道裕, 1770~1846, 자:여재)는 1801년(순조 1) 문과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까지 올랐다. 선전공파 서사심의 차남 서응시(徐應時, ?~1592)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헌과 함께 창의하여 청주성(淸州城)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592년 8월 금산(錦山)에 침입한 적을 만나 분전하다가 칠백 의병과 함께 순절하였다. 묘는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칠백의총(七百義塜)이고, 경기도 포천 대전리에 설단(設壇)하였다.

곽호제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yes@yesm.kr

<저작권자 © 예산뉴스 무한정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예산군 읍·면 뉴/스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