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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이야기 ‘조선의 천재, 이가환에 대하여’

기사승인 2020.07.06  13: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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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가 뛰어나 끝내 다 이용하지 못하리”
정조·정약용 극찬

천문, 지리, 기하에 밝았던 이가환

고덕에 있는 그의 집 헐릴 위험 처해
매입·수용해 국가문화재로 지정해야

 

이가환의 생가 및 섬곡장 전경.

‘혹시 아세요? 표황 강세황, 이철환 등이 모여 시를 짓고 시 모임을 하던 섬사편(剡社編)에 나오는 상장리 섬곡장, 탁천장 터를 알 수 있는지 부탁드려요’

덕산에 거주하는 지인의 문자다.

예산에는 성호학파의 실학자들로 유명하다. 여주 이씨(氏)인 이병휴, 이용휴, 이삼환, 이철환, 이가환 등이 대표적이다. 이병휴는 성호학파의 수장이다. 그의 문하에서 서학을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경학에 정통했으며 저서로는 ‘정산유고’ 등이 있다.

이용휴는 고덕 상장리에서 태어나 외가인 덕산 염곡에서 자랐다. 문학, 음운학, 농학 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정약용은 “그는 일찍부터 과거를 포기하고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어 영조 때에는 그의 문명(文名)이 일세의 으뜸이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실학은 아들인 이가환과 외손 이승훈 등에게 전수되었다. 조선 최초의 영세 카톨릭 신자인 베드로 이승훈은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4대가 순교하였다. 이승훈의 부인은 정약용의 누이였다. 이용휴는 하루에 쌀 구만석을 날랐다는 새태 구만포와 행담도를 통한 뱃길로 안산에 사는 스승인 성호 이익과 왕래하였다.

이용휴의 아들인 이가환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었다. 정약용 등과 교유했으며 조카인 이승훈이 북경에 다녀온 뒤 천주교 교리에 관한 토론을 하고 감화를 받아 천주교 교리서를 번역하는 등 교회 일에 앞장 서왔다.

또한 천문, 지리, 기하에 밝아 일식이나 월식, 황적도의 교차 각도로 계산하고 지구의 둘레와 지름에 대한 계산을 도설로 제시하는 등 시대를 앞서간 대학자였다.

정조대왕이 “금대의 재주가 뛰어나고 문장에 능숙하며 박식한지 남이 끝내 그 능력을 다 이용하지 못하리라”라고 그의 능력을 극찬할 정도였다. 정조 역시 뛰어난 학자였지만 모든 학문을 꿰뚫은 이가환은 정조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이가환의 아버지 이용휴는 예산의 장천리(지금의 지곡리)에 저택을 세우고 장서를 비치하여 명사들과 교류했다. 집 동편에 있는 대지를 확장하여 네모난 못을 파고 오래된 우물에서 대홈통으로 물을 끌어대 연꽃을 심고 정자를 짓고 못의 이름을 점섬이라 하였다.

(이종순씨의 구술 중) 정자에 앉아 있으면 ‘밤낮으로 찰랑찰랑하는 소리와 바람소리가 늘 귀와 눈 사이에 들려온다’ 하였다.

탁천장은 현재 상장2구 회관이 자리 잡고 있어 이미 매몰된 상태이다. 이가환은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생활의 여유와 아름다움과 학문을 섬곡장에서 논하는 조선 최고의 학자들의 모임을 잇기도 하였다. 이철환이 엮은 섬사편에 나오는 첨성리, 즉 점섬에서 열린 시모임의 시편들을 모았다는 섬곡장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 시를 나누며 교유한 명사는 시대차가 있지만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표황 강세황, 이학규, 유득공, 박제가, 신위 등이었다. 모두 시대를 앞서가며 참신한 문예를 추구한 당대 제일의 문인들이었다.

자신을 천재라고 여겼던 다산도 ‘정헌묘지명’에서 이가환을 천재라고 칭했으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795년 가을, 정조는 창덕궁에서 말을 타고 석거각으로 이동하였다. 궁중에서 하사한 말을 타고 따르는 이가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이었다. 정조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하며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청양출신 영의정 채제공과 후계자 예산출신 금대 이가환과 다산 정약용이었다. 정조를 비롯 4인은 부용정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영화당에서 활을 쏘고 이문원으로 돌아왔다… 공은 집안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으나 학문은 가장 깊었다. 구경(九經)과 사서(四書), 23사(史)에서 제자백가, 시 부 잡문 총서, 패관, 상역, 산윤학, 우의마부의설, 악성종양이나 치질 치료법에 이르기까지 글자로 이름 지어진 것들은 한 번 건드리기만 해도 물 쏟아지듯 막힌 데가 없어 한결같이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과 같았다. 질문한 사람마다 깜짝 놀라서 귀신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이처럼 다산 정약용이 그를 형처럼 따르고 존경하며 이 글을 남길 정도였다.

예산땅, 어느 곳도 역사의 교육장이건만 유독 고덕 전 지역이 천주교 수난의 현장임을 아는 이가 드물다. 몇 년 전 프란시스코 교황의 선언을 통해 한국순교 복자 124위가 새롭게 탄생하였다. 그 중 4인이 고덕사람이다.

조선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가 묻혀있는 황무실(호음리)은 선교사 메스트르랑드르 신부가 안장된 교우촌이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여신도회장인 골롬바 강완숙이 살았던 별암미와 높은 뫼, 거더리, 황무실 그리고 현 대전교구 127개 본당의 역사적 모체인 양촌성당 등 수많은 천주교 순교 성인들의 신앙 행적이 고덕면 곳곳에 차고 넘친다.

정조가 주문모 신부의 입국사건에 연루되어 이승훈을 예산으로 귀양 보내고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좌천시켰다. 그 후 대사성, 개성유수,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신유박해 때 사학(천주교)의 수괴로 몰려 옥사했던 조선의 천재 이가환의 집과 섬곡장이 지금 헐리고 멸실될 위험에 처해있다. 농공단지가 공장 터로 확장하기로 공청회까지 마친 상태이다.

소유자 故이종옥(초대 예산군의회 의원)씨가 계실 때는 나라에서 섬곡장도 관리하고 연꽃도 심어주었다. 이 후 관심 뚝! 아무도 쳐다보질 않더니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전국의 천주교 성지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대표 실학자인 금대를 설명하는 안내판 하나 없다. 주차장 하나도 없을 정도로 홀대를 받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치솟는다.

작지만 위대한 여사울 성지와 신리 성지처럼 성역화하면 안되나? 공원화사업으로 이 터를 매입, 수용하고 보존하여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하면 안되나?

현재 예산군의 문화유산을 주제로 하거나 수록한 학술자료 어디에도 이가환에 대한 연구를 찾아보기 어렵고 현황조사조차 없다.

물론, 정조로부터 정학사(貞學士)로 불린 금대에 대한 연구도 절대 부족하다. 천문학과 지리학, 기하학에 정통해 스스로 ‘내가 죽으면 이 나라의 기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라고 할 만큼 탁월한 재사(才士)의 집과 섬사편의 그 연못이다. 현재 못 물도 썩어가고 정자도 사라지고 원형인 골기와도 바뀌도록 방치했다. 짚 앞의 오래 된 천주교 공소도 사라졌다.

우리 예산의 역사적, 문화적, 학문적 가치를 높이고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일임에도 없애려고만 할까? 우리의 고유 문화유산 발굴 및 보존에 행정당국은 왜 그리도 관심을 두지 않는 걸까. 심히 부끄럽다. 이는 과연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주영길 <충남문화재단 이사> yes@yesm.kr

<저작권자 © 예산뉴스 무한정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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