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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효우(仁性孝友) 대련 ①

기사승인 2020.05.25  12: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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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김정희, 그 낯섦과 들춤 사이>

(도1) <인성영남산지무강 효우향백설지간록>대련 글씨.

간송미술관에서의 ‘조선중기서예전’은 꼭 30년 전 이맘때쯤 1990년 5월 20일부터 6월 3일까지 열렸다. 이때는 전시 소식을 접하기도 어려웠고 감상의 기회를 갖기 힘들었을 군복무 시절. 이 전시 소식은 후에 《월간서예》 1990년 7월호를 통해 접했다. 《월간서예》 속표지에는 이 전시의 출품작들이 실렸다. 정명공주(貞明公主)의 대자 해서 글씨 <화정(華政)>을 시작으로 예서 대련 <인성영남산지무강 효우향백설지간록(仁性永南山之無疆 孝友享白雪之干祿)>(도1), 그리고 바로 앞서 이야기한 바 있는 원교 이광사, 행서 두 점 등 모두 네 작품이 실렸다.

이 중 <인성영남산지무강 효우향백설지간록> 대련 글씨는 마주하는 순간 심상치 않다. 이 연재를 기회로, <인성영남산지무강 효우향백설지간록> 대련 글씨의 작가와 글씨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월간서예》에서 이 글씨의 밑에는 “효도와 우애하면 머리가 쇠하도록 官祿을 누릴 것이며, 어질게 살면 南山같이 無窮토록 영생하리라”라고 뜻을 싣고 있다. 그리고 작가를 ‘이인상(李麟祥)’으로 쓰고 있다. 이 ‘조선중기서예전’의 온 작품을 담고 있는 《간송문화》 38호서도 이인상의 글씨로 실려 있다. 작품의 전체 크기도 상당히 크다. 290.5cm의 높이다.

 

이인상의 대련 글씨

이 대련은 최완수 선생이 1998년 지은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2》 책의 <진경시대 서예사의 흐름과 계보>라는 글에도 도판이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이인상을 언급한 부분을 본다.

“한편 예서의 맥은 김수증(金壽增)에게서 사계 김장생의 현손(玄孫)인 김진상(金鎭商, 1684~1755)에게로 이어지고 김진상에게서는 송준길의 현손인 송문흠(宋文欽, 1710~1752)과 이경여(李敬輿)의 현손 이인상(李麟祥, 1710~1760)에게 전해져서 송시열의 문인 유명뢰(兪命賚))의 증손 유한지(유한지, 1760~1834)에게 이르는 사승(師承) 관계를 보이면서 발전하니 예서만은 노론의 전유물이 되었던 듯한 느낌이 든다.”

이 글 이후 추사가 언급된 글이 다음과 같이 바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진경시대 절정기인 영조 때 영의정을 지닌 김흥경(金興慶, 1677~1750)의 현손이며 영조 제일부마(第一駙馬)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의 증손으로 태어나, 진경문화를 주도했던 노론 핵심가문의 학예전통을 가학으로 이어받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안진경체와 예서체를 바탕으로 진경시대의 여러 서체를 아우르며 청으로부터 참신한 비학(碑學) 이론을 수용하여 추사체를 이룩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글씨의 흐름에도 붕당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고 보는 견해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 책에 이 이인상의 대련 글씨는 도판으로 싣고는 왼쪽 아래 “예서대련, 이인상, 지본묵서, 290.5×38.0cm, 간송미술관 소장”이라고 쓰여 있다. 대련 글씨에 대한 별도의 설명은 없다.

(도2) 이인상의 <설송도>

이 예서 대련을 쓴 이인상이 누구인가? 이인상은 자는 원령(元靈)이고 호는 능호관(凌壺觀), 보산자(寶山子). 1710년에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760년에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림에서는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글씨에서는 추사에 비해 유명세가 덜하지만 아는 사람이 제대로 알아 본 작가로 전해왔다. 이인상은 뚜렷한 예술가적 작가적 의식을 가지고 작품 활동에 임하지는 않았지만 개성적인 문인화가로 시(詩)·서(書)·화(畵)로 우리 예단에 또렷이 남아있다. 삼촌 이최지의 영향으로 전각에도 능했다. 보기 드물게 시(詩)·서(書)·화(畵)에 각(刻)이 추가되어 사절(四絶)이다. ‘설송도(雪松圖)’(도2), ‘검선도(劍仙圖)’ 등 인상적인 명작을 남겼다.

 

이인상에 대한 추사의 격찬

이인상이 떠나고 26년 후에 세상에 나온 추사는 이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추사는 이 이인상을 잘 꿰뚫고 있었다. 이인상에 대해 언급한 추사의 글을 보자. 《완당전집》 제7권의 ‘우아에게 써서 보이다[書示佑兒]’라는 글이다. 서자 김상우에게 이인상을 예를 들어 자신이 강조한 문자향서권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더구나 예법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가슴 속의 청고고아한 뜻은 또 가슴 속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들어 있지 않으면 능히 완하(腕下)와 지두(指頭)에 발현되지 않으며, 또 심상한 해서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가슴 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법의 장본(張本)이며, 예서를 쓰는 신결(神訣)이 된다. 근일에는 조지사(曹知事), 유기원(兪綺園 유한지) 같은 제공(諸公)이 예법에 깊으나 다만 문자기(文字氣)가 적은 것이 한스러운 것이다. 이원령(李元靈, 이인상)은 예법이나 화법이 다 문자기가 있으니 시험 삼아 이를 살펴보면 그 문자기가 있는 것을 해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뒤에 해야 할 것이다. 집에 수장된 예첩은 자못 구비해 있다. 서협송(西狹頌) 같은 것은 촉도 제각(諸刻)의 극히 좋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화란(畫蘭)에 있어 오래도록 작자가 없었는데 오직 선묘(宣廟)의 어화(御畫)를 보니 천종(天縱)의 성(聖)으로서 잎 부치는 식과 꽃 만드는 격이 정소남(鄭所南)의 법과 흡사하다. 대개 그때에 송 나라 사람의 난법이 우리나라에 유전(流傳)되었는데 역시 어화도 그를 임방(臨倣)한 것이다. 소남의 그림은 역시 중국에도 드물게 전하며 근일에 익히는 것은 또 원ㆍ명(元明) 이후의 법이다.”

   
 

《완당전집》 제3권에서는 이인상의 전각에 대해 평하고 있다. 대단한 격찬이다. 그 부분이다. “또 함중(緘中)에 소개한 그 각(刻)한 것은 요즘 또 상당 수준이 진보되었습니다. 소자인(小字印) 모회(摸繪)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나라에는 2백 년 이래로 이런 각이 없었습니다. 이원령(李元靈)이 이 법칙에 퍽 능하였고, 근래의 오(吳)ㆍ한(韓) 등의 무리는 모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곳입니다. 설령 그들이 익히 들은 바가 있다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대단히 이상스러운 일입니다.

노재준 <서예가, 예산고 교사> yes@yesm.kr

<저작권자 © 예산뉴스 무한정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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