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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김씨 ①

기사승인 2019.10.28  13: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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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호제 교수와 함께하는 예산의 성씨>
- 내자시윤공파(덕산면 둔리, 신양면 서계양리, 대흥면 탄방리)

   
 

예산 지역에 연안김씨(延安金氏)가 세거해 온 집성촌은 크게 네 곳이 있다. 연안김씨 내자시윤공파(內資寺尹公派)가 세거해 온 덕산면 둔리, 신양면 서계양리, 대흥면 탄방리와 도관찰사공파(都觀察使公派)가 세거해 온 삽교읍 상하리가 그곳이다.

연안김씨는 고려 명종 때 국자감사문박사(國子監四門博士)를 지낸 김섬한(金暹漢)을 시조로 모신다. 그의 선대는 신라 종성(宗姓)으로서 왕에게 직간(直諫)하였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황해도 시염성(豉鹽城 = 현 延安)으로 유배된 이가 있어, 후손들이 이곳에 살면서 ‘연안(延安)’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 김섬한으로부터 7세까지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산26에 경원재(敬源齋)를 건립하여 위패를 모시고, 역내(域內)에 봉단(封壇)을 조성하였다.

 

김섬한의 현손(玄孫)인 6세 김도(金濤, ?~1379, 자;長源)는 1362년(공민왕 11) 청주(淸州) 친시(親試) 문과에 급제하였고, 1371년(공민왕 20) 명(明)나라에서도 과거에 급제하여 동창부(東昌府) 구현(丘縣)의 승(丞)에 임명되었다. 귀국하여 공민왕으로부터 ‘김도장원나복산인(金濤長源蘿蔔山人[牧隱 李穡 지음])’이라는 8자의 친필을 받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랐다. 이런 이유로 그가 살던 곳을 ‘팔자동(八字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왕(禑王) 때 환관과 권신들이 정치에 간여하는 일이 많아지자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결국 이들의 탄핵으로 효수형(梟首刑)을 당하였다.

김도는 아들 넷[自知, 汝知, 致知, 學知]을 두었는데, 장자 김자지(金自知, 1367~1435, 자:元明, 호:逸溪, 시호:文靖)는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까지 올랐다. 학문이 뛰어나 음양(陰陽)·복서(卜筮)·천문·지리·음률에까지 통달하였고, 배불론자(排佛論者)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상(喪)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르도록 여러 아들에게 유언하였다.

연안김씨는 8세 이후 22개파로 분파되었는데, 김자지의 아들 8명[偉·俓·仍·攸·何·侅·備·脩·俱]이 각각 파조(派祖)로 구분되어 연안김씨 중 가장 번성하였다.

예산 지역에서는 내자시윤(內資寺尹)을 지낸 여섯째 김해(金侅) 자손들의 ‘내자시윤공파’가 덕산면 둔리, 신양면 서계양리, 대흥면 탄방리에 세거하고, 황해도도관찰사(黃海道都觀察使)를 지낸 여덟째 김수(金脩) 자손들의 ‘도관찰사공파’가 삽교읍 상하리에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김해의 아들 김우신(金友臣, 1424~1510, 자:侍聘, 시호:胡簡)은 1453년(단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성종(成宗)이 세자였을 때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내고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성종의 배려로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제수받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김우신의 아들 10세 김전(金詮, 1458~1523, 자:仲倫, 호:懶軒, 시호:忠貞)은 1489년(성종 20)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여러 요직을 거쳐 영의정겸세자사(領議政兼世子師)까지 올랐다. 문장에 조예(造詣)가 깊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속동문선(續東文選)』을 편찬해 왕에게 올렸다.

김전의 네 아들[11세 安道, 安遇, 安遂, 安達] 중 첫째 김안도(金安道, 1513~1535, 자:伯由)와 셋째 안수(安遂)의 후손들이 예산 지역에 세거하였다.

김안도의 손자 13세 김제남(金悌男, 1562~1613, 자;恭彦, 시호;懿愍)은 생원과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의 둘째 딸이 선조(宣祖)의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가 되자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피봉되었다. 1613년(광해 5)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사사(賜死)되었고[癸丑獄事] 두 아들[琜, 珪]도 옥중에서 피화(被禍)되었으나, 1616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면서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관작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김제남의 증손 16세 김호(金澔, 1634~1699, 자;浩卿)의 네 아들 중 첫째 김상익(金相益)의 후손들은 대자리종중(大慈里宗中), 둘째 김상윤(金相尹)의 후손들은 보령종중(保寧宗中), 셋째 김상렬(金相說)의 후손들은 덕산종중(德山宗中), 넷째 김상석(金相奭)의 후손들은 약현종중(藥峴宗中)으로 구분된다.

보령종중인 둘째 김상윤(1674~1720, 자;汝任, 南學敎授)의 첫째 아들 김집(金火集, 1690~1736, 자:德輝)의 후손들은 21세 김일연(金逸淵, 1787~1866, 자;任之) 이후 보령과 덕산 지역에 세거하고 있다. 김상윤의 넷째 아들 김흡(金熻, 1711~1784, 通德郞)의 후손들은 19세 김재겸(金載謙, 1747~1817, 자;聖益, 楊根郡守) 이후 태안군 의항리로 옮겼고, 21세 김양연(金養淵) 이후 태안, 대흥, 덕산, 고양 등지에 넓게 분포되었다.

 

연안김씨 덕산종중 숭덕재 전경.

덕산종중인 김호의 셋째 아들 김상렬(1686~1746, 敦寧府判官)은 묘가 본래 고양 대자리에 있었으나 2013년 현재의 위치인 덕산면 둔리 도당산으로 옮기면서, 그의 후손들 묘가 거의 한 곳으로 모여 조성되었다. 덕산종중에서는 2014년 묘 아래에 덕숭재(德崇齋)를 건립하였다.

김전의 셋째 김안수(金安遂, 1485~1551, 자;子成, 行連山縣監)의 아들 12세 김호(金祜, 1545~1613, 자;渭竪, 穩城都護府使兼兵馬節制使)가 당진 시곡리로 옮겼다.

그후 15세 김대석(金大錫, 1611~1691, 자;大器, 朝奉大夫)의 다섯 아들[沂, 汶, 洛, 渭, 涇] 중 둘째 김문(金汶, 1645~1709, 자;光纘, 工曹參議)의 손자 김형(金炯, 1704~1758, 通德郞)이 예산군 신양면 서계양리로 입향하였고, 김문의 자손들을 ‘신양종중(新陽宗中)’이라 일컫는다.

 

연안김씨 덕산종중 김상렬 묘.

김대석의 셋째 아들 김낙(金洛, 1648~1717, 자;光繼, 漢城主簿)은 대흥면 탄방리로 들어와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며, ‘대흥종중(大興宗中)’이라 일컫는다.

<다음 회에 계속>

곽호제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yes@yesm.kr

<저작권자 © 예산뉴스 무한정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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