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ad39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꺼져가던 임시정부를 살린 매헌 윤봉길

기사승인 2019.09.24  15:10:01

공유
default_news_ad2

지난 11일은 3·1만세운동의 피로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통합하여 출범한지 100주년이다. 상하이에서 1919년 4월에 수립된 임시정부와 서울에서 민중대회를 통해 선포한 한성정부 그리고 무장투쟁을 기반으로 결성한 연해주의 대한국민회의가 시대적 요청과 안창호 등의 노력으로 1919년 9월 11일에 통합하였다.

삼권분립에 입각한 최초로 민국(民國)이 시작되는 민주공화제이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이승만을 초대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외교활동에 초점을 두고 독립전쟁에 주력하였다. 안타깝게도 임시정부의 화려한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통부와 교통국 등 비밀조직의 운영과 외교활동에 전념하였으나 서구열강의 냉대와 비협조 그리고 일제의 추격에 의한 국내조직이 와해되었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임정(臨政) 비판세력과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사건으로 탄핵대두와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의 지도노선 갈등으로 여러 정파로 갈라지고 결국 이동휘는 임정을 떠나고 만다. 그렇지만 독립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기반을 회복하는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이를 위해 1923년에 안창호의 제의로 국민대표회가 소집하였으나 임정을 해산하자는 창조파와 임정을 유지하며 개혁하자는 개조파로 나뉘어 결렬되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정을 떠났고, 김구를 중심으로 한 20여명의 임정 고수파만이 남았다.

대통령제의 폐단으로 1925년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이상룡, 양기탁, 안창호 등을 국무령으로 추대했지만 내각구성에 실패하거나 본인들이 고사하여 임정의 정부적 권위가 상실되었다. 결국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1927년 헌법개정을 단행하여 국무위원 집단체제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재정은 초기에는 주요인물들이 낸 자금과 국내에서 전달한 자금으로 운영되었고 인구세와 애국금을 모집하였고 애국공채를 발행했으나 지지부진하였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임정은 청사의 집세가 밀리기 일쑤였고, 고용원의 월급마저 지급하지 못해 중국인으로부터 소송까지 당하는 처지였고 스스로 임정을 거지의 소굴로 비유할 정도였고, 당시 임정 요인들은 쓰레기통을 뒤져 배추뿌리를 찾아 주린 배를 채웠다고 증언하였다.    

김구는 침체된 임정을 살리기 위해 타개책으로 ‘한인애국단’을 만들어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그 일환으로 윤봉길(尹奉吉)은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거행한 일본왕 생일겸 승전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상하이 침공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침략수뇌들을 초토화시킴으로서 일본에 대한 중국인들의 원한을 통쾌히 갚아주어 장제스(將介石) 국민당정부는 윤의사 의거를 계기로 전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장제스는 윤의사가 중국 100만 대군이 못 한 일을 해냈다고 극찬하였다. 김학준편저'혁명가들의 항일회상'에서 독립운동가 정회암은 1932년 윤의사의 의거가 없었으면 임정(臨政)이라는 것은 거기서 끝나게 되었고, 윤의사의 의거로 임정이 살아나 중국 정부로부터 지원받고, 또 해방과 더불어 귀국할 때도 임정을 앞세워 떳떳하게 나서게 된 것도 모두 윤의사의 피 하나의 결과라고 회고했다,

장제스는 1932년 10월에 김구 등 임정 수뇌를 초청하고 뤄양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해주었고 1940년 광복군창설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임정 청사의 운영비와 임정요인들의 활동비, 한인교포 생활비까지 지원하였다.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윤의사의 의거에 감명을 받은 장제스는 연합국정상들을 설득하여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창하여 카이로선언문에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명시되어 연합국이 한국독립을 보장하였다.

이승만 박사는 도왜실기(屠倭實記) 서문에서 윤의사의 장거(壯擧)가 있은 이후로 중국 국민당 정부는 물론이요, 장제스주석 부처(夫妻)가 김구선생을 절대로 신뢰하여 음으로 양으로 임시정부를 성원해준 것은 모두 이 때문이요, 그중에도 한국 해방의 단서가 된 '카이로회담'에서 장제스가 솔선해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주창해 연합국의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 역시 그 원인(遠因)은 윤 의사의 장거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에 즈음하여 우리는 꺼져가던 임시정부를 다시 살린 25세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원한 청년’ 매헌 윤봉길의사의 희생을 다시 기억했으면 한다.

이성섭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상임위원> yes@yesm.kr

<저작권자 © 예산뉴스 무한정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3
default_nd_ad5
ad37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default_news_ad4
default_nd_ad3

최신기사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예산군 읍·면 뉴/스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